사계의 5월은 새롭기만 하다. 일년 열두 달, 사계절이 돌고 있지만 오월은 항상 새롭게 찾아온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람마다 개성 따라 좋아하는 계절이 있을지라도 오월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오월은 여왕의 나들이에 열두 달이 시녀처럼 따라오는 계절의 환희를 불러주는 생명과 생기와 새로움의 절정이다. 날마다 반복되는 일과 속에 권태를 씻어주는 새로움이 없다면 인생처럼 따분한 동물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반복되는 가감승제미적분(加減乘除微積分)의 일과에 지쳐 있고 쳇바퀴 도는 인생에 싫증이 나 있다.
그러나 오월의 아침은 권태와 싫증의 각질을 깨부수고 날마다 자고 나면 새 세상을 꽃으로 열어 보여주고 있다. 나이에 따라 환경에 따라 사계 중 어느 계절이 좋아지고 싫어지는 차이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월이 없으면 계절이 없어지는 것이다.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다.
뉴욕에는 지난 사월 중순에도 눈바람이 몰아쳐 겨우내 간직한 속살로 수줍게 핀 목련의 하얀 꽃 위에 눈이 덮여 눈인지 꽃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이 혼돈의 와중에 계절마저 돌아버린 시기와 증오의 발악이었다. 설마인들 오월에야 그런 아귀 같은 다툼도 사라지고 안정된 자연의 제 모습을 가다듬고 있는 계절이기를 기대해 본다. 테크노 시대에 N세대가 아무리 새것을 추구한들 자연이 주는 오월의 N계절에는 차원 다른 새로움이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터널을 뚫어가고 있다. 그 굴 속에는 굴착기의 굉음과 터지고 있는 건설(?)을 위한 파괴의 폭음 속에 귀도 먹고 눈도 멀었다. 좀더 기다려 보아야 트일 봄 안개다. 글로벌 공동체를 향한 변화와 남북간에 얽힌 54년 막힌 터널 400km를 뚫고 있다.
4·13 총선 결과가 증명해준 대로 남북 분단은커녕 동서 지방색은 더욱 선명하게 색깔을 드러내고 있다. 남북이 통일되기 전에 통일된 동서간에 지방 색깔부터 지워야 할 것이 우리의 당면한 제일 과제다. 한나라당은 영남(嶺南)당, 민주당은 호남(湖南)당, 자민련은 충청도당이 되어서는 이 땅이 ‘아 대한민국’으로 함께 설 수 없다.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시민연대의 낙선운동 참여가 그래도 신선한 오월의 바람이다. 386세대가 권태의 각질을 깨고 대거 진입한 것은 어떤 새 바람을 기대해도 좋을 여운을 주고 있다.
새순으로 새로움을 상큼하게 안겨준 오월의 신록에 남산의 흐드러진 아카시아 꽃향기가 황사 덮인 잿빛 서울을 맴돌며 새로움을 휘날리고 있다. 그러나 참 새로움의 원천은 인간 마음에서 온다. 새 마음이 아니고는 새 날이 새 날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본연의 겸허를 찾고 생기의 원천 생명인 사랑을 찾지 않으면 우리가 뚫어가고 있는 이 터널은 붕괴의 위험속에 헛 공사일 수밖에 없다.
부활 절기마다 미국의 방송은 두 개의 영화를 거의 해마다 반복 방영한다. 하나는 모차르트의 ‘아마데우스’이고 다른 하나는 ‘벤허’였다. 아마데우스 테마곡은 ‘진혼곡’이고, ‘벤허’의 테마곡은 ‘사랑의 흐름’이었다. 모차르트의 천재 재능에 살리에르의 시기가 증오로, 증오가 살인으로 변해, 평생을 자신의 장례를 위한 진혼곡을 들으며 미친 폐인으로 지옥 같은 정신 병동에서 죽어가는 살리에르의 지옥 권태의 죽음의 종말이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명화 ‘벤허’는 사랑의 실체이고, 생수의 원천인 청년 예수가 나타날 때마다 ‘사랑의 테마곡’이 향기처럼 흐른다. 벤허는 자기 어머니와 누이를 처형한 친구 ‘맛셀라’를 죽여 원수를 갚아야 하는 증오로 불타 있었다.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당시 천병(天病)으로 알려진 문둥병에 걸려 격리된 동굴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경기에 이기고 원수 멧살라는 죽었지만 그를 용서할 수 없는 벤허였다. 그때 같은 나이의 젊은 청년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를 흘리며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이 알지 못하옵니다”는 말이 벤허의 귀에 박혔다.
벤허는 알지 못하는 힘에 이끌려 평생의 원수 멧살라를 용서하겠다는 기도를 했다. 그때 그 순간 문둥이가 되어버린 어머니 그리고 누이동생의 몸이 깨끗해지면서 새 살이 났다.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제 나름대로의 의식 속에 시기, 분노, 증오, 원수가 있다. 이런 의식이 우리를 덮치고 있는 한 우리는 환희의 새로움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지쳐 있고 반복적 만성 권태병에 걸려 있다. 권태의 각질에 두껍게 들들이 말려 있다. 새로움을 깨닫지 못하는 삶의 문둥병에 걸려 있다. 예수 사랑이 생명이 될 때에 삶의 문둥병으로부터 치료될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새롭게 되는 영원한 진리는 사랑이고 용서이고, 남의 인격을 하늘처럼 받들어 주는 데 영원한 5월 새순으로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들길 방천에 나가 논두렁길을 걸으며 새로 나는 나물과 들꽃이라도 보면서 마음속의 새로움의 원천과 실체를 찾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