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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靈親) 운동의 배경
1965년 입석이라는 곳에서 650명의 대학생이 5박 6일의 여름수련회를 가졌다. 350명은 믿는 학생이었고, 300명은 믿지 않는 학생들이었다. 믿는 학생들이 안 믿는 학생 한 사람씩을 짝으로 맡아[영친 운동의 시작] 책임지고 기도하기로 했다. 3일 만에 한 의대 학생이 분위기에 못이겨 도망을 가고 있었다. 짝을 맡은 학생이 울면서 내게 달려와 같이 붙잡으러 가자고 해서 뒤쫓아가서 붙잡았더니 짝했던 학생이 도망가던 학생을 끌어안고 엉엉 울어 버렸다. "너, 왜 그러냐?"는 말에 "내가 너를 위해 내 생명을 대신 취해가도 좋으니 예수 믿고 구언받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떠나가니 가슴이 아파서 그렇다."고 했다. 도망가던 친구가 미안해서 돌아왔다. 마지막 밤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나 혼자 300의 반항하는 맹수들의 정글 속에 들어가고, 350명은 4시간을 다른 캐빈에서 엘리야의 갈멜산 꼭대기의 격투같은 결사 기도가 집중되었다. 네시간 만에 사 백의 맹수가 양같이 순해 지고 두 사람 외에는 다 결신을 했다. 두 사람은 돌아오는 길 에 차 안에서 결신했다.
-예수칼럼 : 김준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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